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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회 심사때 제출했던 자기소개서의 일부입니다.초심을 언제까지나.
8. 수도 생활에 대한 생각입니다.
저는 수도자의 삶이 거지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스로 생산 활동을 하지 않고 신자들이 주는 물질로 살아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거지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걸식한다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신자들은 헌금과 교무금을 낼 때 하느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냅니다. 따라서 그 물질에 대해 정직하려면 수도자는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존재 이유에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이야기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면서 ‘너희들도 이렇게 하라’고 하셨고. ‘너희는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지가 첫째 될 거라며 섬기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수도자의 본질은 종이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수도자가 게으르고 권위적이라면 그것은 종으로서의 자격 미달이고 그것은 맑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비판했듯이 사람들에 기생해서 사람들을 길들이고 사회에 순종하게 만드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사는 삶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할 때 비로소 ‘영광스러운 거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수도자의 삶의 본질은 종으로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요. 따라서 수도자에게 있는 인간관계는 그와 ‘벗’이든지 아니면 그에 대해서 내가 ‘종’인 두 가지 관계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에 초심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제가 만일 입회하게 된다면 이 초심을 잊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9. 내가 살고 싶은 삶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제 생각에는 딱 두 가지 생각뿐이 없었습니다. 하나는 ‘세상은 힘이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은 혼자다’ 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유별나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체제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만드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을 신뢰하지 못했고 모든 사람들이 결국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 또한 믿지 못했고 남녀 간의 사랑도 결국 ’욕구의 포장‘이 아니냐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는 그때 혼자 있는 것은 차라리 버틸 수 있었습니다. 호젓함이 주는 여유와 깨끗함 그리고 자연 속에서 느끼는 평온함이 있었기에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고 가슴이 뛰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했습니다. 타인이 먼저 떠날까 두려워 자꾸 먼저 사람을 떠나는 사람처럼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거리를 두고자 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떠날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마음을 비우고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 메말라 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 내안에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사랑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그 순간에도 사실을 마음 더 깊은 곳엔 사랑을 받고 싶은 강한 갈망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강하게 거부하는 그 몸짓이 사실은 더 강하게 바라는 몸짓일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이는 정말 이세상이 아무런 살맛이 안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 무렵 ‘사랑이 생명’이라는 말씀이 어렴풋이 이해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서로 사이좋게 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노래 중에 산울림의 <무지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왜 울고 있니? 너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왜 웅크리고 있니? 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너를 위로하던 수많은 말들..
모두 소용이 없었지
“어둠 속에서도 일어서야만 해”
모두 요구만 했었지
네가 기쁠 땐 날 잊어도 좋아
즐거운 땐 방해할 필요가 없지
네가 슬플 땐 나를 찾아와 줘
너를 감싸 안고 같이 울어 줄게
네가 친구와 같이 있을 때면
구경꾼처럼 휘파람을 불게
모두 떠나고 외로워지면은
너의 길동무가 되어 걸어 줄게
-산울림 <무지개>
그때부터 제 아이디는 길동무였습니다. 앞으로 저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저희 어머니, 아버지의 길동무, 여자 친구의 길동무, 동생들의 길동무, 예수회 형제들의 길동무, 슬픈 사람 가난한 사람들의 길동무, 꼬맹이들의 길동무, 새들과 나무들의 길동무로 살고 싶습니다. 길동무는 이미 다른 사람을 전제한 개념입니다. 이웃이 없이는 길동무도 없습니다. 세상은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그렇게 한세상 함께 사이좋게 살다가 죽고 싶습니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